인천 구도심 답사 3 -인생백세고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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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13 14:09

인천 구도심 답사3 – 인생백세고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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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구도심 답사 마지막 이야기를 홍예문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일본인 거주지를 확대하기 위해 일본군 공병대가 응봉산 허리를 뚫고 만들었다는 얘기는 했다. 그런데 일본군 공병대는 공사를 설계하고 감독을 했을 뿐, 정작 돌을 깨고 흙을 나른 것은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삼국 합작이라 할까. 그 시절 인천은 조선 최대의 국제 도시(?)였다. 당시까지는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살았고 일본인들도 홍예문을 뚫고 거주지를 확장할만큼 인구가 늘었으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개항장이라는 특성상 서양 사람들도 적잖이 자리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공원은 그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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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곳은 국내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다. ‘park’의 개념이 최초로 도입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선에 들어와 살던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휴식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했다. 이 세레딘사바틴은 ‘사바틴’으로 우리 근대사에 종종 출몰하는 사람이다. 고종이 1년간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하여 덕수궁 중명전, 정관헌 등 서양식 건축물을 만든 것이 그였다. 또 을미사변 때 경복궁에서 민비가 시해되는 것을 본 사람이기도 하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그는 인천에서 일했는데 자유공원을 조성한 것은 무려 188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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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세창양행 건물이 있었다. 세창양행은 독일인들이 세운 회사다. 답사 리더 종수가 묻는다. “구한말에 들어온 독일 물건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게 뭔지 아냐?” 그러자 대뜸 50대 주부들이 대답한다. “쌍둥이칼 아니야?” 종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답은 엉뚱했다. “바늘이야. 조선 바늘은 그렇게 잘 부러졌다고 해. 하지만 독일 바늘은 워낙 튼튼하고 절대 부러지는 일이 없어서 조선 어머니들이 독일제 바늘을 그렇게 탐했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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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기억이 난다.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최초의 근대적 광고의 주인공이 세창양행이었다. 1886년 2월 22일 발행한 한성주보 제4호에 세창양행의 ‘고백’이 실린 것이다. 대충 요약하면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여우, 개가죽 등등과 담배, 종이, 옛 동전 등 여러 물건을 사들이고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洋景, peep show), 뮤직박스(八音考), 호박(琥珀), 유리, 각종 램프, 서양 직물,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을 팝니다.” 여기에도 ‘바늘’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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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조선 사람들의 쇠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신미양요때 우리 군대가 휘두르는 칼이 미군의 근대적 강철과 부딪치자 대번에 부러져 버렸던 것처럼, 바늘 하나 똑똑히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조침문’에서 사망한(?) 바늘은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신’ 것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일일이 가족들 옷을 만들어야 했던 부인들에게 똑똑한 바늘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청나라 것도 감지덕지인데 절대 부러지지 않는 독일제 바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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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리더 종수에 따르면 이 세창양행 직원들을 위한 숙소가 이 일대의 랜드마크처럼 서 있었는데 한껏 멋을 부린 서양식 건물은 6.25때 아작이 났고 그 자리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더글라스 맥아더 동상이 섰다.


“아 근데 쪽팔리는 게 말이야. 원래 동상이란 게 사람들 죽고 나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거잖아. 그런데 이 동상은 맥아더가 죽기도 전에 세웠어. 하기야 옛날에도 명나라 장군 이여송 생사(生祠)를 지은 전통이 있는 나라긴 하지만.” 종수 말도 맞긴 하지만 뭐 어디 맥아더 뿐이냐. 이승만도 거인처럼 세웠다가 4.19 때 길바닥을 끌려다녔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동상을 언제부터 세웠는데.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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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동상을 올려다본다. 그와 인천이라는 도시는 세계사적으로 붙어 다닌다.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인천에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상상해 보라. 상륙해서 한창 싸우는데 물이 쫘악 빠져 버리면 어떻게 될지. 뻘 위에서 다닥다닥 게걸음을 하다가 떼죽음당하는 것이다. 미군 장교들도 목숨 걸고 반대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적들도 그래서 여기로 안온다고 생각할 거야.” 뭔가 있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말도 안되는 논리로 맥아더는 도박을 했고 그 도박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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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탈환에 욕심내지 않고 퇴로를 차단하면서 보급을 끊었으면 오히려 인민군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을 거야. 인민군 주력은 낙동강에 있었으니까. 근데 서울 탈환이라는 ‘쇼’에 몰두해서 서울로 병력을 집중시켰어. 그래서 서울 탈환에 열흘이 훨씬 넘게 시간을 끌지. 그때 인민군 주력은 낙동강에서 철수하는데 성공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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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맥아더 동상을 올려다본다. 하여간 저 고집불통. 원자탄 수십 방을 북한과 만주에 갖다 붓자고 고집하는 걸 트루먼이 잘라 버렸기에망정이지..... 그런데 종수가 또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 준다. “저 사람은 자신이 일종의 일본 총독이라고 생각했어. 일종의 국가원수급? 자신의 영지를 지킨다는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일본에 도착한 뒤 일본을 하루도 떠난 적이 없어. 심지어 한국에서 전쟁을 하면서도 한국에서 단 하루도 머물지 않았어. 인천에 왔다가도 비행기 타고 일본에 돌아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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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하루도 머물지 않은 미국인 장군이 인천의 명물 자유공원의 상징이 돼 동상으로 못박혀 있는 풍경. 인천 상륙의 공로는 지대하다 할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동상에서 돌아설 때 뒤통수가 따끔거리긴 한다.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또 한 번 사바틴의 흔적과 만난다. 제물포구락부.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의 음차다. 즉 제물포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사교클럽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역시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다. 문을 열고 나가면 ‘단풍국’ 캐나다가 나오던 그 요술 같은 문이 바로 이곳 구락부의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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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무척 많이 닮은 드라마 속 도깨비가 구한말 인천을 거닐었다면 그는 필시 청일조계 경계 계단을 내려가며 혀를 찼을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데 조선이 아니구나.” 자유공원에서 개항누리길로 내려오는 청일조계 경계 계단을 기점으로 양쪽에는 변발을 한 청나라 사람들과 게다 신은 일본인들로 붐볐던 것이다. 건물도 달랐고 거리 분위기도 판이했다. 중국인 거리가 만들어진 것도 결국 우리 조상들의 못난이 행동 탓이었다. 1882년 이전만 해도 인천에 청나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의 출동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대가 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에 눌러앉으면서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몰려왔던 것이다. 일본인들이야 당연히 작심하고 몰려 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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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곳곳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은 풍경들을 보게 된다. 일본 영사관으로 쓰던 곳에 1933년 신축하여 인천부(府) 청사로 쓰이던 건물을 지금도 인천 중구청이 사용하고 있고 한때 조달청이 사용하던 일본제일은행인천지점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인천개항장근대건축관’으로 탈바꿈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왕년의 일본 조계 분위기를 재연하며 새롭게 지어진 일본식 건물들과 100년 가까운 풍상을 간직한 일제 강점기의 고건물들이 분명 어긋나야 하는데 그럴싸하게 들리는 기묘한 화음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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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엄청나게 몰려 살며 제물포 거리를 휩쓸던 청나라 사람들, 화교들의 거리는 사실상 소멸했었다. 중국인들이 대거 학살됐던 만보산 사건 이후 화교들은 대거 식민지 조선을 떠났고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중국인 견제 정책을 시행했고 (중국집에서 쌀밥 사용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화교들은 수십년간 몰려살던 그들의 터전을 대부분 떠나고 왕년의 중국인 거리는 일종의 슬럼가로 퇴락했었다. 한국에 짜장면을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중국집 공화춘도 1983년 문을 닫았으니까..... 오늘날 차이나 타운은 1999년 이후 관광지로 재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이제는 제법 차이나 타운 느낌을 갖춰 가는 것처럼 보인다. 세월이란 그런 것이겠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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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타운에서 일행이 일부러 찾아든 곳 중의 하나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이다. “의롭고 선하게 살자”는 뜻이라는 이 사당에는 관우, 용왕, 관음보살, 옥황상제 등 잡다한 신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리더 종수의 설명. “항구에는 반드시 있는 시설이 유곽 그리고 이런 사당일 거야. 바다와 함께 살고 항해를 일상으로 해야 했던 사람들이니까.” 아울러 타국에서 터를 잡은 청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들어 그네들 공동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변발한 앞머리를 맞댔고 ‘공화춘’, 즉 공화국의 봄 이후에도 이곳에 모여 기도하고 앞날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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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둘러보던 일행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누군가 쿵푸 포즈를 취했고 다들 까르르 웃으며 비슷한 포즈를 잡는다. 거기에 또 누군가 엉터리 중국어로 ‘황비홍’ 주제가를 불러 댔다. “짱 푸 땅 수 육 짬뽕 유 산 슬 량 거~~~~~” 마냥 우스개로 한 행동이지만 따지고보면 아주 장난스럽지도 않다. 이 의선당에서 청나라 사람들, 화교들은 쿵푸를 연마하며 심신을 단련하기도 했고 만보산 사건 때에는 조선인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모였던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정숙해야 할 사당에서 장난을 친 건 안됐으나 거기 계신 관우와 옥황상제와 용왕님 등등도 그렇게 불쾌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시끄러워봐야 니들이 중국 사람 따라 가려면 어림도 없다.”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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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근처에 있는 ‘낙타 사막’이라는 특이한 까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2층은 그야말로 널찍한 방이었다. 마침 손님이 없어 열 두 셋의 사람들이 마치 MT를 온 듯 널부러졌다. 거기서 또 힘이 남아도는 이들은 테이블에 모여앉아 마치 20대 대학생들이라도 된 듯 별의 별 게임을 하며 자기들끼리 박장대소 허리를 꺾는다. 그 풍경이 사진처럼 와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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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도 더 전의 풍경과 21세기 ‘호모 마스쿠스’의 시대가 어우러진 인천 구도심. 나이 쉰 넘은 사람들이 까페 바닥에서 20대 젊은이로 돌아가고 한때 사라졌던 차이나타운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100년의 세월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우리에게 100년이란 얼마나 긴 세월인가. 앞으로 50년 뒤 2070년이 되면 나를 비롯해 함께 한 사람들은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스쳐간 풍경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거나 ‘의구한 산천’의 일부가 돼 또 다른 사람들의 발길을 맞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용을 써봐도 100년도 못사는 게 인간일 뿐이다. 인생백세고래희. 그러나 새롭고 다른 사람들이 이 거리를 채우겠지. 그들은 아픈 과거를 추억하지 않기를. 갈아엎고 다시 만드는 부산함이 아니라 옛것이 온전하고 새로움이 곁들여진 평온한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