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재구성(7) - 연대하고, 배려하고, 칭찬할 줄 아는 사람

  • 조회수 16
  • 10/16 20:59


만화가 원수연은 신해철에 대한 기억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 당시 고스트네이션인가....? 만화가들이 무척 많이 들었던 프로였어요. 저도 어시들이 좋아하고 저도 재미있어서 매일 듣는 방송이었고요. 신해철씨가 워낙 만화를 좋아해서 모르는 작품이 없을 정도였다는 건 프로를 듣다보면 알게되요. 당시가 90년대 였으니까 저와 제 작품도 알고 있다고 느꼈었어요. 누님도 만화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해요. 저희 화실에선 구정이나 그런 명절에도 일 한 기억이 많았기 때문에 신해철씨가 명절 당일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 전화 달라해서 제 어시가 저 허락없이 전화해서 통화 중에 빨리 끊었던 에피소드도 있었죠.

그런데 제가 정말 고마웠던건... 97년에 청소년보호법 계도기간이 선포되기 전에 이 청소년보호법이 만화 말살 정책이라는 것을 후배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청소년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만화말살정이 되어 버렸던 거에요. 협회 중심으로 샘들은 알고 계셨지만 문제는 후배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 때 떠오른게 신해철 프로그램이었어요. 만화가들이 정말 많이 듣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알려주면 좋겠다 생각해서 글을 급하게 막 써내려 갔어요. 기억은 잘 안나지만....꽤 긴글이었어요. 그걸 어시스트한테 다시 대필시켜서 방송 5분전에 팩스로 넣었어요.

그런데 신해철이 시작멘트도 없이 그 긴 글을 거의 다 읽어 내려갔어요. 나중에는 글씨가 잘 안보여서(제 어시 필체가 좀 작고 흐려서..) 못 읽겠다고 했는데 제 기억으론 거의 다 읽어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후배들에게 알리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청소년보호법 반대 운동을 만화계가 똘똘 뭉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할이 어디까지 였는지 모르겠지만 기억하는 후배들이 있는 걸 보면 엄청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신해철은 대놓고 나서서 청소년보호법 반대 발언을 이어갔고 이현세샘 천국의 신화를 옹호하며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맹공을 퍼부었던 걸로 기억해요.

나중에는 이현세샘이 책 보내주고 싶다고 해서 보내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러 곳에서 만화인들의 편이 되어서 발언을 해줬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에요. 신해철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켠이 아파옵니다. 당시 만화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제 후배는 넥스트 앨범을 제게 선물하곤 했어요“

가수 전인권의 조카이자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감독인 전인환은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신해철님께서 인권 삼촌 딸 - 저의 사촌동생 - 결혼식에 와주셨습니다. 그때가 인권 삼촌께서 치료를 받고 다시 재기 중이시던 때였습니다. 한동안 활동이 없으셔서 힘든 시간을 보내시던 때였어요. 다른 후배 가수분들은 많이 못뵌 것 같은데 신해철님이 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뜻 축가를 불러주셨어요. 축가를 부탁한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자발적으로 불러 주신 듯했습니다. 그리고 축가가 끝나고 인권 삼촌께 예를 표하시더라고요. 따님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롹의 황제시라고. 당시에 자신감 없고 의기 소침했던 인권 삼촌에게는 그보다 더한 위로와 찬사는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신해철은 이 강렬한 기억 하나입니다”

그는 그렇게 필요한 자리엔 조용히 나서서 자신의 역할을 했으며, 생색내지도 않았다. 자신이 절정에 있을때도 선배들에게 예를 갖추었고,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의 찬사를 듣던 선배들의 쑥쓰러워하면서도 흐뭇해하던 그런 표정들이 인상에 많이 남아 있다. 방송에서 산울림에게 리스펙트를 표시하던 신해철을 김창완이 쑥스럽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모습 같은 것.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음반 작업을 준비하던 강헌이 어느날 쓰러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신해철에게 SOS를 쳤다. 진작에 참가 요청이 왔었는데, 이미 거절했던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인간이 쓰러졌잖아요. 몸이 마비되서 안움직이는데, 이메일을 한통 보냈다고 하는데, 이메일보니까 딱 두줄이더라구요. 손가락 두개밖에 안움직여서 그 두개로 쳐서 보낸 메일인데, 나중에 형수한테 들어보니까 몸을 완전히 못 움직이는데, 어떻게든 컴퓨터로 기어가서 손가락 두개 움직여서 저한테 헬프 메일을 친거예요. 저 그런거에 엮이잖아요. 대타로 투입이 되가지고 한 곡을 참가한게 아니고, 앨범 전체 프로듀서가 된거예요. 대타로. 아, 씨바.(웃음) 다른 한편으로 음악적인 욕심이 있었는데요. 제가 학교다닐때 공부는 NL(민족해방계)에서 하고, 시위는 CA(NL보다 급진적이었던 제헌의회)에서 했잖아요. 근데 CA가 어떻게 보면 훨씬 교조적인, 앞뒤 꽉막힌 답답한 분위기였잖아요. 통기타 들고서 운동가요 부르는건 되지만, 전기기타는 안된다는 그런 교조적인 사고방식, 대학교 2학년될때까지는 기타를 그만두고 음악도 때려치고, 거의 운동하는것만 신경쓰고 있을땐데요. 옛날에는 사실 나도 운동권이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나대는거 같아서요. 87년도에 운동권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편하게 얘기하거든요. 세월도 많이 흘렀구요. 하여간 그때 운동가요들을 들을때 너무 짜증이 나는거예요. 노래들은 너무 좋은데, 예를 들어 ‘꽃상여타고’를 들으면 ‘야, 이것은 장중하게 오케스트라를 넣어서 윗도리를 화려하게 움직이지 말고, 아랫도리를 밑으로 깔아서 라흐마니노프 풍으로 만들면 되게 멋있을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노동현장에서 쓰이는 선전 선동 가요들이 너무 후졌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나치의 이념에는 물론 당연히 동조할 수 없지만, 나치의 선전선동 예술의 퀄리티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잖아요. 정치 선전선동 장르는 제가 못해봤잖아요. 그래서 너무 해보고 싶은거예요. 그래서 노동의 새벽에 뛰어들었죠. 그 앨범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저는 자부심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앨범이예요. 완성도 면에서. 저는 학교다닐때 노학연대에 관심이 있는 쪽은 아니었어요. 정서적으로도 거리가 있었구요. 어쨌거나 선전선동 예술이라는 그 점이 매력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물론 ‘시다의 꿈’ 같은 경우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전순옥 박사의 목소리를 쓰게 하겠다’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제가 볼때는 재치였는데요. 진짜로 시다를 했던 분 아닙니까? 처음에는 되게 사양을 하시다가 제가 직접 만나서 설득을 드리고 해서 하게 됐는데, 목소리가 죽이게 나왔어요. 정말 애잔한 떨림과 그 아마추어적인 목소리, 그 뒤에다가 살벌한 인더스트리얼 테크노 사운드를 깔아놨는데, 공장에 기계돌아가는 소리의 비트들, 그 위에 불안 불안하게 떠돌아다니는 전순옥씨의 목소리, 예산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그래서 힘들게 작업을 했구요”

그 작업이 끝나고 신해철은 병원에 실려갔다. 결국 돈을 벌어야 할 시점에 돈이 되지 않는 앨범 작업에 6개월 매달린 결과, 회사가 망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죽기 전까지 강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